털 날리는 계절 Shedding Season
오랫동안 손댄 적 없는 책장, 조명, 장식품 위에는 약속이나 한 듯이 먼지들이 균등하게 포진해있다. 바닥에 퍼졌다 뭉쳐지다 여기저기 눈치 없이 굴러다니기를 반복하다 청소 당하는 이들과는 달리 그들은 비교적 숨죽이며 몸집을 키운다. 언젠가 사물의 껍질이 될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쌓인 시간만큼의 무게가 하강하는 날이 오고 말겠지만 말없이 머물던 자리에서 그대로 떨어지는 일은 없다. 수직선(z 축)에서 0이나 마이너스로 하강할지라도 수평선(x, y 축)에서는 크고 작게라도 일정한 거리를 이동한다는 말이다. 때로는 중력의 방향에 역행하여 더 높은 지점으로도 이동하는 이 모든 배경에는 바람이 불고 있다.
에너지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한다는 단순한 자연법칙 하나가 바람과 해류를 일으키고 구름을 만들고 비를 뿌려대며 온갖 것들을 반복적으로 뒤섞어 열적 평형상태를 이루려고 한다. 평균을 향한 여정 그러니까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의 귀소본능이 내 방의 이불 먼지를 스탠드 위, 창틀에 올라가게 만드는 셈이다.
<털 날리는 계절>은 바람에 대한 이야기다. 내 발밑에 떨어졌어야 할 머리카락이 어떻게 서랍장 밑으로 들어갔는지에 대한 의문을 배경으로 행위의 반복과 시간이 무게로 다가오는 순간의 변화와 움직임을 조각의 틀과 표면의 부피로 담아낸다. 본질에서 탈락한 표면(털, 껍질, 틀)이 갖는 형태와 부피를 더하고 덜어내는 행위의 빈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의 흐름을 감각하는 전시가 되길 바란다.
글_이의성
너의 이름은 바람, 너의 이름은 조각
: 박소영X이의성의 《털 날리는 계절》
온도를 정의하지 않았던 과거에 우리의 경험에서 비롯된 온도의 뜨거움과 차가움 정도로 체감하는 시절이 있었다. 당시에 온도를 측정하기 위해 어떤 기준점 같은 것이 필요했는데 과학자들은 이를 ‘고정점(fixed point)’이라 부르면서, 실제 정확한 온도를 가리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어떤 기준을 정하기 시작했다. 새로 발명되었던 온도계의 정당성은, 구축된 표준이 선행된 일반적인 표준을 존중한다는 의지에서 기인한다는 지점에서 눈길을 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인 요소를 정량적으로 수치화하는 방식이 둘 사이를 ‘충분하게 존중한다는 의지’에서 시작된다는 이같은 태도는, 온도의 추상성과 감각에 무게를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온도라는 열 에너지를 인식하는 방식은 측정 도구가 생기기 전에 시간의 축 안에서 지극히 주관적이고 유동적인 것에 해당되었다.
신체의 개입은 온도계 대신에 비물질의 감각을 현실화하는 매개체로서, 신체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열전도의 흐름을 감각적으로 환원하는데 일조했다. 전시 《털 날리는 계절(Shedding Season)》(2021, 쇼앤텔)은, 박소영과 이의성이 온도의 미세한 감각을 조각적인 태도로 조우하는 시간과 행위에 대한 이야기다. 제목에서처럼 ‘털 날리는 계절’은 일시적으로 스쳐 지나가고 변환되는 계절을 암시한다. 이를 환절기라 부르기도 하는데, 과거의 것을 덜어내어 허물을 벗는 유동적인 시간이자 다가올 미래에 대한 암시이다. 또한, 털 날리는 계절은 부산물이 쌓이는 시간과 동시에, 주변부로 흩어지면서 불필요한 에너지를 포섭해 물질로 환원되는 무용함에 대한 시간들이다. 비생산적인 무용함을 특정 대상에서 발견하는 두 작가는 《털 날리는 계절》에서 ‘털 날리듯’ 열 에너지의 감각을 통해 허공에 입자들을 쓸어 담고 조각적으로 상상한다.
《털 날리는 계절》은 공간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순환고리를 가시적으로 제시하는 작업들에서 시작한다. 공간을 아우르는 ‘바람’과 ‘온도’는 전체를 암시하는 서막처럼, 명확한 사물과 언어로 전치되는 박소영의 <차가운 바람>(2015)과 <바람>(2015), 그리고 이의성의 <하아>(2021)가 들어서자마자 눈에 밟힌다. “바람”이라는 서툰 단어는 박소영이 오랫동안 조각의 표피로 사용했던 인조 잎사귀를 투명한 필름지에 인쇄하여 바람개비 모양으로 오린 형태들을 꼴라주한 것이다. 이미지-언어가 맞은 편 벽에 걸린 환풍구의 프로펠러에 덧입혀진 은빛 인조 잎사귀의 표면과 교차되어 재료와 대상을 환기하는 가벼움과 투명도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반면에, 알루미늄 액자를 두르고 있는 거울 <하아>는 재료와 형식에 의존하는 <바람>과 다르게 작동한다. “하아”라는 의성어에 의해 뜨거운 수증기가 채워지고 사라지는, 즉 신체를 이용하여 입김을 불어넣고 손끝으로 지워낸, 혹은 그려낸 행위의 시간성을 담고 있다. 한번쯤은 우리가 느꼈던 아주 사소하고, 소중한, 놓치기 아까운 사라져 버릴 순간을 박제하고 싶은 어떤 간절함처럼 말이다. 무심한 듯 유희적이고 일상적인 이 작업은 《털 날리는 계절》을 풀어내는 두 작가의 온도차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무심함은 연성이 높고 가벼운 재료를 활용해 스스로의 윤곽을 만드는 조각적 행위로 이어진다. 박소영과 이의성이 공통으로 사용한 알루미늄 망과 석고는 온·습도에 의한 열전도율을 매개하며, 조각의 표면과 덩어리를 구현하기에 효율적이다. 이 두 가지는, 전시 풍경의 흐름과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로 조각적 태도에 형식 서사를 도출한다. 특히, 알루미늄을 즐겨 사용하는 이의성은, 지난 작업들에서 노동의 형식과 가치체계의 전후를 정량적으로 관찰하고 그 구조를 서사적으로 묘사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노동 주변에 잔존하는 힘의 감각에 주목해 은유적인 장면들을 연출한다. 온·습도에 가변적인 재료로 풍향과 풍속을 상상하게끔 하는 <바람막이>(2021)와 파도 형상을 띠고 있는 공기중의 무언가를 쓸어 내기 위한 도구와 함께 자주 등장했던 소년의 절단된 신체 (2021)는, 서정적인 심상을 통해 유동적으로 변하고 순환하는 저항 에너지의 감각을 연극적으로 보여준다.
순환적인 가치를 포괄하고 있는 재료를 이용한 이의성의 허구적 독해는 연상될 법한 주변의 서사들이 누락되어 부분적으로 걸러진다. 특히, 알루미늄 망과 투명 뽁뽁이를 사용하는 것은, 추가적인 비용이 들고, 생산하지 못하는 노동에 비유했던 포장지 작업의 맥락과 유사하다. 구겨진 포장지의 무늬를 다시 패턴화 하여 포장지를 제작했던 작업에서 나아가, 유실되는 노동의 가치를 바람에 빗대어 시적으로 가시화 한다. 투과되는 망과 투명한 뽁뽁이를 허물로 비유했을 때 그 부피는 본질을 감싸는 것으로 내부의 알맹이에서 표면으로 향한다. 작가의 사적 경험에서 촉발되는 이같은 방식은, 윤리적인 문제나 인간의 희망을 기저에 두고 사물에 대한 인식의 관습을 지적하는 것과 같다. 특히, 박소영은 기능을 상실한 사물을 표피-덩어리에 주목해 조각의 현상적인 측면을 바라보고, 모호한 형태에 대한 조각적 실천을 지속해왔다. 그는 저 멀리 두께와 물성이 제거된 지극히 가볍고 얇은 비물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결국은 다시, 조각을 품어 길들여지지 않고 스스로 살아있는 조각의 습성에 의지한다.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형태를 인식하고 물성을 다루는 태도의 경우, 박소영의 <수석 시리즈>(2009-2021)에서 두드러진다. <수석 시리즈>는 수석 받침대인 나무 틀의 형태에서 시작해 그 가장자리와 면적을 훑어 나가면서 소조와 직조를 통해 덩어리를 만드는 조각의 프로토타입(prototype)이기도 하다. 작가가 수용할 수 있는 두 손바닥 안에서 조각적 물성과 형태를 직조하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석고를 물과 혼합시켜 물컹한 표면을 뭉치고, 덧대고, 덜어내는 과정 안에서 작용하는 손끝과 손바닥 힘의 세기는 덩어리의 표면과 선을 직관적으로 구현하는데 일조한다. 이는 신체가 조각적 형태에 밀착된 관계와 직결되는데, 작가의 손끝으로 소조와 직조가 동시에 진행되는 과정은, 인간이 수석(壽石)을 찾는 과정과 묘취를 즐기는 취미와 유사하며 수행적이기까지 하다. 축소된 조경이기도 한 수석은 실제로 그 가치를 회화적인 색채와 무늬에 두지만, 박소영은 백색의 석고로 형태를 직조했다는 점에서 가시화된 가치의 기준과 기능을 완전히 제거하고, 수석이 담고 있는 서사를 무력화 한다. 이로써, 수석을 중성적인 대상으로 대하는 작가의 조각적 태도가 부각되어 순수 조각에 이르게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개별적으로 나열된 뽀얀 백색의 덩어리를 받치고 있는 나무 받침대이다. 목조각 형태의 수석 받침대는 단아하고, 섬세하고, 소박하여 그 두께와 면적이 제각각이다. 조각 덩어리를 지지하고 있는 좌대는 조각과 사물을 오가는 다소 모호한 위치에 놓이게 되는데, 지지체와 형상의 관계 속에 작동함으로써 사물이라는 시선에서 벗어나 조각의 담론에서 발견되는 ‘부분대상(part-object)’으로 해석된는 여지를 준다. 실제로 수석을 수집할 때 그 가치가 검증되면, 돌의 형태에 적합하도록 나무 받침을 정교하게 제작해야 하는 순서와 달리, <수석 시리즈>는 작가의 나무 받침 수집이 선행되어 조각 형태의 자취를 발견해 나간다. 이처럼, 겉에서 안의 방향으로 덩어리와 표면을 인식하는 방식은 수석이 지녀야 할 네 개의 조건인 질감, 색채, 형태, 굴곡처럼 조각적 형상 안에서 유사 맥락으로 가져간다. 특히, <수석 시리즈>를 통해 추상 조각이라는 언어가 부각되는 것은, 수석이 갖고 있는 “축경미(縮景美)”와 수집의 태도, 그리고 가치의 서사적 측면이 표면 위에 드러나지 않고, 은밀하게 조각적 지지체의 감각으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서사 이면에 박소영과 이의성이 주고받는 바람, 파도, 수증기, 열과 같은 온도와 에너지를 환유할 수 있는 감각을 상상한다면, 수석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담고 있는 지질학적 환경과 비물질적인 요소의 운동성에 기인할 것이다.
<수석 시리즈>와 나란히 동일한 크기의 평균대 위에 상응하는 이의성의 <털 날리는 계절>(2021)은 전시의 주요 작업 중 하나다. 고립된 시대를 살고 있는 현재, 심리적으로 밀착 관계의 대상일 수 있는 반려 동물의 ‘털’에 주목한다. 어찌 보면, 개와 수석은 인간의 소유욕과 수집, 그리고 애착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둘은 유사하다. 이 둘은 노동 생산적인 가치보다 사치품에 가까운 것으로, 효율성이 떨어지고 타 영역에 가치를 두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개의 몸을 감싸고 있는 껍데기이자 존재감을 위한 포장 역할을 하고 있는 털은, 이의성에게 생산적이지 않은 무용한 물질로 바라봄으로써, 털을 깎아 나가는 과정의 흐름을 아홉 개의 캐스팅한 개 조각을 통해 보여 준다. 그는 개의 속살이 드러나도록 조각도로 표면을 깍아 나가면서 파생된 석고 가루를 고스란히 개들의 가장자리에 쌓아 놓았다. 규정하기 모호한 예술적 노동이 노동 생산성의 범주에 속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는 작가는, 노동을 무게와 길이로 환산해 왔던 작업의 방식을 일부 가져왔다. <털 날리는 계절>은 가치체계에 대한 사유를 제작에서 발생한 부산물을 정량적으로 접근하고, 전후를 가시화 했던 이전 작업들과 공통되면서도 차이를 보여준다. 그는 ‘조각하기'에 대한 행위에서 발생한 유실된 차이를 수치화 하지 않고, 축적된 석고 가루를 쌓아 조각의 가장 작은 단위를 통해 시간성의 무게를 감각적으로 인지할 수 있도록 한다.
두 작가의 조각 연작이 평행하게 설치된 풍경은 온도의 존재성을 보장하는 열역학의 ‘열적 평형상태’와도 같다. 평균대 위에 알루미늄 받침대를 덧댄 연출 방식은, 바람과 온도의 에너지 감각을 가시화 하여 재료의 성질을 연극적으로 확장한다. 자발적으로 에너지를 밖으로 배출하려는 성질을 갖고 있는 온도는 차갑고 뜨거운 에너지가 열의 형태로 움직이는 것과 같다. 독립적인 물리량으로 존재하는 온도가 다른 대상과 접촉하여 열 교환이 일어났을 때 열이 순환하게 되는데, 물리학적으로 두 물체가 충분한 교환을 통해서 열 평형에 이르렀을 때 온도가 같아진다. 이와 같은 원리는, 평형을 이루는 두 평균대의 연출과 상대적으로 열 전도율이 높은 알루미늄 받침대 위에 놓인 조각 사이에 운동 에너지를 감지할 수 있는 조각적 상상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동일한 크기의 평균대를 사용하는 박소영과 이의성은 둘 사이에 조각이 충분한 교환을 통해 같은 온도의 풍경을 공유한다. 둘의 조각적 관계는 온도라는 비물질적인 대상을 두고 오브제와 조각 사이의 틈을 인식하도록 한다. 이로써, 알루미늄 평균대에 흐르는 열을 감지한 에너지의 흐름이 그 위에 놓인 반려 동물과 수석이 담고 있는 시간과 선형적으로 주고 받도록 각자의 ‘상태’에 주목한다.
한 명은 입자를 분해하여 껍데기를 바라보고, 다른 한 명은 물성을 축적해 덩어리로 향하는 상반된 태도를 보여주지만, 공통적으로 둘은 조각이 갖고 있는 중량감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한다. 마치, 가벼운 털들이 공기 중에 흩어지고 방향이 고정되어 있지 않듯, 비물질적인 감각까지 조각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박소영과 이의성은 위계없이 동등하다. 몸짓과 크기를 동반하는 나열과 순환하는 시간을 인지할 수 있도록, 정적이고 동적인 움직임이 수행되는 평균대 위의 조각들과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작업들은 결국, 보이지 않는 것을 조각적으로 구현해낸 장면들이다. 지극히 조각적이고, 구조적이고, 실용적인 도구로 사용되는 전시의 중심인 평균대는 두 작가의 실천적 태도를 상징한다. 고대의 곡예사가 줄타기 곡예를 한 것에서 유래된 이후에 체력 향상을 위한 운동과 훈련에 쓰인 것처럼 말이다. 예컨대, 목재 평균대 위에 5cm가 더 넓은 폭의 ‘연습용’ 받침대를 알루미늄 재질로 덧댄 방식은 둘에게 ‘조각하기’에 대한 끊임없는 연습과 고찰을 대변한다. 즉, 스승과 제자였던 둘 사이에 간극을 무색하게 할 조각에 대한 동등한 태도와 실천(practice)인 것이다. 박소영과 이의성에게 이같은 행위는 연륜의 차이로 조각을 인식하고, 구사하는, 상반되면서도 유사한 태도를 기저에 두고, 끊임없는 ‘연습’이라는 수행적인 행위에 자신을 위치 짓는다. “본질에서 탈락한 표면이 갖는 형태와 부피를 더하고 덜어내는 행위의 빈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의 흐름을 감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_글. 추성아, 독립기획자